베이스 다이가 뭐길래 — 데이터 통로에서 두뇌로
차세대 HBM 로드맵을 들여다볼 때 시선은 흔히 'D램을 몇 단까지 쌓는가'에 쏠리지만, 업계의 진짜 승부처는 늘 맨 밑바닥인 '베이스 다이를 누가, 어떤 설계와 공정으로 만드느냐'로 귀결됩니다. HBM은 D램 코어 다이(C-다이)를 수직으로 쌓고, 맨 아래에 전체 구조를 지지하며 제어를 맡는 베이스 다이(B-다이, 로직 다이)를 두는 구조입니다. 베이스 다이는 GPU·CPU 같은 외부 프로세서와 HBM 사이의 데이터 입출력과 전력·신호를 관장합니다 — 지금까지는 D램 공정으로 만들던 "통로" 역할이었습니다.
왜 로직 공정으로 넘어가나 — 2048비트가 바꾼 물리
HBM4에서 상황이 바뀝니다. 2025년 4월 확정된 JEDEC 표준(JESD270-4)은 데이터 통로(I/O)를 전작의 2배인 2048비트로 늘렸습니다. 통로가 2배가 되면 베이스 다이 안에 고속 입출력 회로를 그만큼 촘촘히 심어야 하고, 늘어난 전력·성능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베이스 다이의 로직 설계·공정 역량이 중요해졌습니다. 다만 적용 공정과 생산 방식은 업체별로 다릅니다 — 삼성은 자사 파운드리 4나노, SK하이닉스는 TSMC 협력, 마이크론은 자체 개발한 첨단 CMOS 공정을 쓴다고 각각 밝히고 있습니다.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메모리 회사가 혼자 완결하던 HBM에 로직 설계와 파운드리 생태계가 들어왔다는 것.
삼성전자 — 수직통합
삼성은 2026년 2월 12일, 1c D램과 자사 파운드리 4나노 공정 베이스 다이를 적용한 HBM4의 업계 최초 상용 출하를 발표했습니다. 핀당 동작 속도는 11.7Gbps로 JEDEC 표준(8Gbps)을 약 46% 상회합니다(자사 전작 HBM3E 9.6Gbps 대비 1.22배). 메모리·파운드리·패키징을 한 지붕에 두고 일괄 대응하는 구조가 처음으로 분명한 무기가 된 사례입니다. 증권가에서는 캐파 확대를 근거로 "2027년 HBM4 출하량 기준 1위는 삼성"이라는 전망(대신증권)도 나옵니다 — 다만 이는 리서치 전망이며, 이미 출하를 시작한 만큼 실제 판도는 추가 고객 확보와 공급 확대 과정의 수율·품질 유지가 가를 것입니다.
SK하이닉스 — 동맹
HBM 시장 선두인 SK하이닉스는 2분기부터 HBM4 양산 출하를 시작했고, 현재 양산분의 베이스 다이는 TSMC 12나노급 공정으로 만듭니다. 다음 세대 HBM4E의 베이스 다이를 인텔 파운드리에도 맡기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단독 보도가 나왔지만, 회사는 "검토하고 있는 바 없다"고 공식 부인했습니다 — 멀티벤더 여부는 미확정입니다. 외부 파운드리 활용은 검증된 로직 공정과 패키징 생태계를 빠르게 확보하는 길이지만, 보도에서는 로직 공정 베이스 다이의 원가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한편 SK하이닉스는 2026년 6월 18일 차세대 HBM4E 12단 샘플의 주요 고객 공급을 공식 발표하며 세대 전환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엔비디아 — 판을 넓히기
엔비디아가 2026년 8월 26일 공식 발표한 NVHBM은 자체 메모리 컨트롤러를 HBM 베이스 다이 안으로 옮기는 설계입니다. 발표 기준으로 표준 HBM4E 대비 대역폭이 최대 30% 높아지고 전력은 15% 줄며, 컨트롤러 이동과 맞춤형 인터페이스 축소로 XPU(GPU 등 연산 칩) 다이 면적을 25% 아낄 수 있습니다 — 독립 실측 검증 전의 발표 수치입니다. 엔비디아는 여러 메모리 공급사에 걸친 구현을 표준화해 고객의 통합·검증 부담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하며, 첫 협력사로 아마존 안나푸르나 랩스(Trainium4)를 공개했습니다. 다만 베이스 다이 규격을 칩 설계사가 정의하게 되면 메모리 3사의 차별화 여지가 줄어들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오고, 반대로 복잡한 로직 베이스 다이를 실제로 만들어내는 제조 난도를 감안하면 로직 설계·생산 역량을 갖춘 제조사에 기회라는 분석도 공존합니다.
커스텀 HBM — 표준 제품에 고객별 설계가 더해진다
베이스 다이의 로직화는 '커스텀 HBM' 흐름과 맞물립니다. HBM4E 세대에서는 표준 제품과 함께 고객사(하이퍼스케일러·칩 설계사)별 맞춤 베이스 다이 제품이 병행 제공되는 방향이 공식화되고 있습니다 — 마이크론은 표준·커스텀 병행 제공 방침을 밝혔고, NVHBM도 그 커스텀 축의 하나입니다. 범용 일변도였던 메모리에 고객 전용 로직을 심는 선택지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JEDEC도 유기 기판을 쓰는 파생 표준 SPHBM4(JESD330-4, 2026년 7월 발표)를 내놓는 등 패키징·인터페이스 선택지 자체가 넓어지고 있습니다.
이 경쟁이 한국 반도체에 뜻하는 것
이 구도를 한국 밸류체인 관점으로 다시 읽으면 세 가지가 남습니다.
- 메모리 경쟁력에 파운드리가 얽혔다 — 동맹을 짜든 수직통합을 하든, 이제 HBM 로드맵은 로직 공정 로드맵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 베이스 다이는 설계 인력 싸움 — D램 설계와 다른 로직 설계 역량이 필요하고, 커스텀 HBM 시대엔 고객별 설계 대응력이 곧 수주 경쟁력입니다
- 표준의 무게중심 이동 주시 — 대형 고객이 사실상의 표준을 제시하는 흐름이 강해지면 JEDEC 표준과 고객 규격의 이중 트랙이 됩니다 (→ 엔비디아 로드맵 글의 '축 2 메모리'와 연결)
편집자 전망 — 범용 존과 커스텀 존
결국 HBM 시장은 JEDEC 표준을 따르는 범용 볼륨 존과, 빅테크별 전용 설계를 심은 커스텀 하이엔드 존으로 갈라질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메모리 제조사가 단순 부품 공급자가 아니라 고객사와 아키텍처를 함께 정의하는 파트너로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새 공식 발표가 나오면 업데이트되는 기준 글이며, 주가·투자 판단이 아닌 기술·수요 구조 해설입니다.
